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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04-29 16:04 조회12,5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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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실(60·경제) 선배에게

 

그러실 겁니다. 어처구니없고 영문모를 일이죠. 마지막으로 얼굴 본지가 4반세기가 넘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살았다 죽었다 엽서 한 장 없었던 자로부터 이 느닷없는 편지를 받게 된 사건(?) 말입니다. 하기는 인생자체가 어처구니없이 시작된 것이니. 그런데, 선배! 이 어처구니없이, 느닷없이, 영문 모르게 생기는 사소한 해프닝들이 이따금 우리의 생을 얼마나 재미있고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선배! 오늘은제 뚱딴지 같은 얘기를 들어주시죠. 그것이 비록 “생의 풍요”는 커녕, 계속 어처구니 없고 영문 모를 얘기로 남는다 할지라도. 1977년 6월 하순 어느 날 김포공항 옛 국제선 청사에서였습니다. 선배와 제가 마지막 만났던 것은. 그때 저는 깊은 절망과 혼돈 속에서 기가 한참 죽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참이었습니다. 그럴때 느닷없이 선배가 허둥지둥 청사로 뛰어 들어와 저를 찾아냈습니다. 

 

“선배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박형! 정말 다 버리고 가버릴거야?” “전 KIWI 가 되기는 싫어요. 네, 대학 전임강사 자리 귀중하지요. 조만간 교수로 이어질 것이며 그리고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이 보장될 테고. 그런데 제 분야는 연극 아닙니까? 미술, 음악 교수가 이론 강의도 중요하지만 전시회도 열고 연주발표도 가져야 하듯이, 연극 교수도 연극 공연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제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에서 강사자리만 유지한다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습니까. 그게 꼭 이름만 새지 날지 못하는 KIWI 나 다를 게 뭐가 있겠 습니까?” “그렇지만, 가족도 생각해야지. 갓난애들도 둘이나 되는 걸로 아는데, 전임강사 몇 년 했다지만 뻔한 빈털털일텐데 미국에 가면 뭐 어찌 하려구?” 대답 대신 전 서둘러 승강장 입구로 향하며 “어서 들어가 보세요. 직장까지 조퇴하고 나와 줘서 고마워요”하고는 돌아섰을 겁니다. 

 

무정한 놈이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실은 눈물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와 선배는 학창시절 서로 호의는 가지고 있었지만 특별히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지요. 공항에까지 배웅 나올 선배로는 전연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배의 몇 마디와 얼굴표정, 눈빛은제 처지에 대한 선배의 이해와 동정, 그리고 그 시대의 유신체제가 젊은 연극학도의 꿈과 인생을 잘라 버린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죄책감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저는 어처구니없이 엉뚱한 죄목으로 여러 사찰기관에 끌려가 치욕적인 심문과 조사를 받고 모교에서의 전임강사직까지 위협받고 있었죠. 죄목이란 불법모임조직?운영이랍니다. 

 

그 시절 제 욕심은 서강대학극장에 재학생들의 Drama Club활동을 넘어선 Resident Theatre Group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연극은 우선적으로 연기자들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재능 있는 연극학도들을(타교 졸업생, 재학생도 포함) 모아 몇 년간 여름 방학이면 연기훈련을 진행시켰죠. 그러다가1976년 가을에는「서강극단」의 첫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중 느닷없이 불법 연합대학생 그룹활동이라고 활동금지 처분을 받고 저는 “맹약서”라는 것에 서명을 강요받았는데 그것이 모교에 계속 남아 강의는 계속하되 앞으로는 일체 Youth Theatre 활동에 관여치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기상 드높던 독수리를 땅바닥에서나 뒤뚱대는 KIWI로 전락시킨 계기였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한 두달을 동부,서부, 북서부를 배회하다 결국 정착하기로 한곳은 New York 이었습니다. 연극학도면 꼭 꿈꿔보는 목적지이죠. 뉴욕을 택한 이유는 불행하게도 인구밀도가 높고 영주권 없이 불법으로 취업할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생존원칙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연극공연은 못했지만 연극을 살았습니다. 연극공연을 할 때는 그래도 빛나는 역할도 맡아봤건만 연극을 살면서 맡은 배역들은 하나같이 후질구레하고 전직 대학교수(?)가 맡아 하기에는 참 뭐한 배역들 뿐이었습니다. 

 

오늘 선배에게 펜을 들게 된 진짜 신나는 얘기를 드리죠. 얼마 전 서울의 연극반 후배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서 형, 서울에 좀 나와야 되겠어요. 서강대학극장이 그동안 대대적인 개수, 시설보완을 끝내고 곧 다시 개관하는데, 그 재개관 자축 기념공연을 갖기로 했고 졸업생 공연의 연출은 영서 형에게 요청하기로 합의를 보았어요, 당장 서울로 나오시죠” “뭐라고 다시 말해봐 어떻게 된 거라구? “ “다시는 뭘 다시해요 괜히 국제전화요금만 올라가요. 서강대학극장에 와서 연출하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후배들 통화료 많이 부담할까봐서가 아니라 울컥 감격이 복받쳐 올라와서였습니다. 연극 때문에 서강을 떠났던 제가 연극으로 인하여 다시 서강 캠퍼스에 돌아가 이번엔 연극을 사는게 아니라 하려고 땀을 흘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어찌 감개무량치 않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염치(?) 좋게 후배들의 전화에다 "알았어"하고 수락한 것이 노탐이 안 되도록 이번 공연준비에 혼신을 기울여 넣겠습니다. 선배, 27년 전 공항에 나와 주셨듯이, 제가 연출한 공연이 있는 날 서강극장에 오셔서 제 손을 한 번 더 힘껏 잡아 주시기 빌겠습니다.

 

박영서(61 영문)은 현재 뉴욕에서 해외투자자들을 국내에 유치하는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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